시. 공간의 위치 이동

시. 공간의 위치 이동

임대식 (아터테인 디렉터)

시간은, 그것을 해석하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 무한 반복되는 원의 형태이거나 처음과 끝이 있는 직선의 형태로 나타난다. 시간을 무한히 반복되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의지는 현생과 내생의 의미를 같은 선상에 두고 시간의 개념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고 처음과 끝이 있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의 생명이 현재가 끝나고 전혀 다른 스테이지로 이동한다는 근거를 바탕으로 시간의 개념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은 제한적이지만 그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사고의 방향과 의지에 따라 영원할 수도 있다는 믿음이, 곧 매일의 삶을 견딜 수 있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모든 문명은 큰 강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황하강, 인더스강, 라인강 그리고 아마존강과 같이. 우리에겐 나라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 한강이 있었다. 한강을 차지한 부족국가가 한반도를 다스리는 맹주가 될 수 있었던 역사와 함께 한강은 한반도를 통치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지리적, 정서적 위치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한강에는 수 없이 많은 역사와 함께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이 담겨 있다.
이창훈 작가의 한강은 물질적 치환을 통해 시. 공간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일반적인 감각 영역에 대해 묻고 있다. 그 수많은 사연을 담고 바다로 흐르고 있는 한강을 순간적이지만 얼음으로 고체화 시켜버림으로써 한강에 담겨있던 우리의 기억과 일상의 시간들이 순간 멈췄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그 순간만큼은 단순히 실제적인 시. 공간을 느끼는 감각을 벗어나 삶의 기억들이 저장되고 기록될 수 있음을 꿈꿀 수 있었다. 주어진 생명만큼, 삶의 지난한 흐름만큼 한강은 수 천년 동안 그 흐름을 멈춘 적이 없었다. 이창훈이 한줌의 한강을 전혀 다른 공간으로 가져다 놓은 것은 지난했던 우리 삶은 유구하게 흘러 온 한강에 비해 한줌도 안 된다는 것. 그 의미를 확인하고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작가는 한 줌 한강에 담긴 그 엄청난 시간들을 산의 형태로 얼렸다. 시간을 공간으로 시각화 시켰다. 물론, 산 역시 수없이 많은 시간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나갈 수 있는 공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 역시 시간에 대해 민감할 수 있다. 산과 강은 서로 존재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흐르는 강물과 우뚝 서 있는 산을 바라봤을 때, 받아들여지는 감정은 상당히 다르다. 강은 덧없이 흐르는 우리 삶의 시간을, 산은 몸 뉘일 곳 없는 삶의 허한 공간에 대한 상징들을 담고 있다.
산처럼 얼린 한강.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한강이 고체화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얼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산의 모양으로 얼려진 한강은 그 동안 우리가 감정이입을 해왔던 대상들이 사실, 우리의 주관적인 감정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늘 주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로써 반복되는 우리 삶에도 어느 순간 스스로 숭고했었던 기억도, 경험도 있었다는 것을 떠오를 수 있게 하는 단서들이 늘 우리 곁에 있었다는 것. 하지만 한줌의 한강이 거대한 산으로 얼려지게 되면서 그 단서들을 찾지 못했다거나 찾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