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공간·인간 3개 재료 버무려 조형언어 창작

시간·공간·인간 3개 재료 버무려 조형언어 창작

황인옥 (대구신문 기자)

시간과 대등하게 맞설 사람이 존재할까? 영원한 시간 속에서 찰나적인 존재로 태어나면서 인간의 불행은 시작됐다. 인간의 영원한 굴레이자 고뇌의 눈물인 ‘시간’을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다방면에서 진행됐지만, “목적을 달성했다”는 기쁜 소식은 아직은 요원하다. 작가 이창훈의 예술적인 담론은 인간의 영원한 탐구 대상인 시간을 전제로 한다. “인간이 가진 유한성 때문에 늘 시간에 쫓기고 언젠가는 끝나야 한다”는 이야기로부터 그의 예술은 출발한다.

한지석, 이창훈, 박인성 3인이 꾸리는 윤선갤러리(아트플렉스) 기획전인 ‘마이너스(Minus)’전에 소개되는 그의 작품들에 시간을 인식하는 태도가 녹아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이번 전시에 최초로 소개되는 사진작품 ‘한강’이다. 수석(壽石) 형상으로 주형틀을 만든 후에 채취해 온 한강물을 부어 얼리고, 틀에서 분리하여 촬영한 작품이다. 물이 융해되는 찰나를 찍은 사진이다.

또 다른 전시작인 ‘원프레임(1Frame)’은 20여년 전부터 한국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원작은 1장의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에, 즉 9개의 화면을 설치한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선 9장의 이미지를 한 화면에서 상영하는 버전으로 설치했다. 각각의 이미지는 특정 영화의 모든 프레임을 합해 하나의 프레임으로 환원한 것이다. 예를들면 1시간 30분 분량의 영화가 하나의 이미지 속에 압축하는 식이다. 소리와 형상은 사라지고 하나의 추상적인 상(像)으로만 남게된다.

설치작 ‘탑’에도 시간의 순환은 아로새겨져 있다. 제습기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공기포집기를 공간에 매달고, 공간을 채운 비시각적 감각들은 이 장치를 통해 포집, 그 아래 놓인 그릇들에 액화되어 모이고 공간에 흐르는 시간의 순환을 가시화한 작품이다. 이때 그릇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공간을 채우며 의미를 부각한다. 그리고 작업에 사용되는 사용감 있는 그릇과 기계 장치들의 소음은 작업적 주제를 관념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과 이어지게 만든다. 그릇 속의 액체는 냉동고로 옮겨져 고체로 열려지도록 하는데 이번 전시에 이 과정은 제외됐다. “탑은 인간의 욕망을, 시간이 지나면서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은 욕망 또한 찰나에 지나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의 이야기는 ‘시간’에서 끝나지 않는다. 더 먼 곳, 그의 의식이 향하는 궁극의 대상은 다름아닌 ‘인간’이다. 비가시적인 시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그가 즐겨 사용하는 미술적 도구들은 인간의 흔적을 머금은 것들이다. 작가가 직접 캐스팅한 공간이나 채집해 사용되는 도구들인데, 인간 삶의 역사가 중첩되어 있다는 공통분모로 엮여있다. 한강물에는 한강을 끼고 세대를 이어가며 살아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 세 장소에서 포집한 물에는 ‘삶’의 실체가 녹아있다. 작업에 활용된 영화들의 주제 역시 ‘인간’이다.

“어떤 공간 속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이고 관념적인 시간성을 가시화하기 위해 삶의 역사를 모으고, 수집했어요. 시간성 속에 흡수되어 있는 숨어있는 인간의 삶,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나 의미들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죠.”

그가 인식하는 인간은 ‘욕망지향적’이며 ‘허무적’이다. 그는 수석이나 공기 포집 작업으로 자연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고, 무역의 통로였던 한강물로 물질에 대한 욕망을 형상화했다. 영화 역시 금전이나 사랑 또는 출세욕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하지만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도, 현실적인 안락을 위한 다양한 욕망도 결국 허무주의로 끝이 난다. 얼려진 물은 녹아내리기 마련이고, 끝간데없는 인간의 욕망도 더 큰 욕망이나 죽음 앞에 사그라든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시간 앞에서 허무하지 않을 인간은 없는 것 같아요.”

무의미하게 지나치는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세상의 변화는 시작된다. 고착화된 관념이나 의미없이 흘러가는 일상에 파열음을 내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의 작업 방식 또한 이런 규칙에 부합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이나 자연현상을 자신만의 독특한 어법으로 시·공간을 결합해낸다.

그는 자신이 낸 파열음이 연쇄적으로 작용하여 관람객의 마음에도 균열을 낸다면 “작가로서 임무 완수”라는 생각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라는 3개의 재료를 버무리며 그만의 조형언어로 창작한다.

가장 먼저 자기반성으로부터 작업이 출발한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공간이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의 층위를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라는 반성적인 질문을 통해 물리적인 공간에 인문학적 소스들을 버무린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느낌과 정취 같은 비물질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여 경험하며 더 넓고 깊은 세계로의 여행으로 인도한다.

‘시간’을 작업의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종착지는 ‘시간’ 너머의 인간을 바라본다. 시간은 매개일 뿐 속내는 “더 삶다운 삶에 대한 염원하는 것”에 있다. 그가 시·공간을 예민한 조형성으로 구축한 작품들이 관람객들에게 다가갔을 때 “그들이 존재의 근원을 스스로 자각하며 말초적인 욕망이나 허무주의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열망을 불태우기”를 희망한다. 전시는 9월 2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