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보에 갇힌 그림자

림보에 갇힌 그림자

이병희 (갤러리정미소 아트디렉터)

얼마 전에 영화 ‘Inception’(감독 Christopher Nolan, 2010)을 보면서 재밌는 설정 하나를 발견했다. 그들이 마지막에 실시한 몇 단계의 꿈이 중첩된 꿈-실험에서 한 남자가 죽음에 처하게 된다. 보통의 한 단계의 꿈-실험에서라면 죽으면 꿈에서 깨어나지만, 이 경우에는 죽으면 현실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로 일종의 림보상태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림보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보통의 코마상태 혹은 불법이주자들의 상태를 비유하는데서 발견되는데, 일종의 오도 가도 못하는,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를 ‘림보’에 비유하곤 한다. 아마도 굳이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더라도, 이때의 림보로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몸은 비록 현실에 있지만 정신은 어딘가 알려지지 않은 시, 공간에서 떠도는 상태, 깨어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상태는 사실 주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떠한 권리, 어떠한 인간으로서의 조건, 존엄, 지위 등등을 모두 획득하지 못하는, 혹은 그로부터 영원히 배제된 상태이지만 ‘죽지 않은’ 상태이며, 그 외부에 ‘영원히 갇힌’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이런 림보의 상태가 우리와는 다른, 예외적인 상태라고 볼 수 있을까.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항상 어떤 토크나 글에서 깨어나지 않는 현대인, 산-죽은 상태의 현대인을 책망하며 ‘좀비’상태에서 깨어나라고 다그친다. 지젝의 좀비라는 표현을 빌자면, 좀비는 삶과 죽음의 가장자리에서 ‘권리’를 획득하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주체’이지도 못한 상태로, 즉 림보에서 떠도는 존재라고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현대는, 그렇지만 우리에게 이런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는 더더욱 좀비상태로부터 깨어나지 못하는지도, 혹은 우리가 어느 시공간에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전지구화를 넘어서 이제는 사이버 세계가 우리 삶을 확장시켰고, 나아가 우주세계까지의 확장을 내다본다고 했을 때, 우리는 벌써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공간이 얼마나 (무한히) 확장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더불어 우리 삶은 공간적인 확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일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꿈, 환상, 미지의 시간 등등이 휘몰아치는 시간적인 혼돈 상태까지 맞이하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일찍이 들뢰즈(‘차이와 반복’)가 지적한 것을 참조하자면, 주체의 입장에서 보는 현재라는 시간은 기억의 시간, 경험의 시간과 미래적 시간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과거로부터의 기억 혹은 트라우마의 흔적이기도 한 무의식의 시간, 우리가 경험하는 ‘지금’이라는 시간, 그리고 환상 혹은 망상, 소망이나 기대, 미래에 대한 전망의 시간 등등이 끊임없이 반복하며 겹쳐져서 현재라는 것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창훈의 작업들을 일별해보면서, 나는 현대 주체를 특징지어 온 의심하고 성찰하는 이성적 의미의 주체상을 넘어, (들뢰즈적 의미를 빌어서 이야기하는) 시간의 종합 혹은 반복으로서의 ‘현대의 시간성’을 ‘우연적으로’ 경험하는 훨씬 분열적이고 복합적이며 post-human적인 주체상을 상상해 보았다. 물론 그것은 지금의 상징적 구조의 변화를 골치 아프게 야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이창훈의 작업 중, 걸어가는 사람의 뒤통수에 비디오를 장착하여 그 사람의 뒤 풍경을 기록하는 작업인 ‘(비)가시적인’(싱글채널비디오, 2006), 개와 개에 비유된 한 남자가 곳곳에 설치되고 그 남자가 스스로를 반영해보도록 거울을 설치한 작업인 ‘나, 개, 거울, 그리고 나’(혼합설치, 2003), 종이로 만든 돌과 자연석을 나란히 병치시키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돌’인가를 질문한 작업인 ‘stone,(stone)…’(테이블위에 설치, 2004) 등은 때때로 정체성을 질문하고, 무대화시키는, 즉 반영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주체의 조건에 대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내가 보기엔 주로 (죽은, 시든, 사라지는, 상실되는) ‘흔적’에 대한 작업들로 볼 수 있는 작업들이 있는데, 이들은 일종의 반복으로서의 우리 삶 혹은 시간성의 측면에서 조망된다. 가령 비디오 작업인 화분이 서서히 시드는 영상을 길거리 창가에 프로젝션 한 작업인 ‘춤’(DVD프로젝션, 2004),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에 스크린에 자막이 서서히 올라가고 빛이 없는 블랙 화면만 남는 장면처럼 새의 이름이 승천하듯 자막처럼 올라가도록 만든 ‘날아가다’(비디오설치, 2004), 실제 꽃잎들이 시들어가는 것을 전시한 ‘채집’ (꽃잎들, 2004) 등을 비롯하여, 0(혹은 無)에서 시작하여 0(혹은 원)으로 끝나는 부질없는 우리 삶을 주사위 게임에 비유한 작업인 ‘게임’(모니터와 사진 설치, 2005) 에서는 주사위가 구르고 구르다 (마치 영원히 굴러야할 것처럼) 둥글게 마모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또한 사람 모양의 초들(즉 군상)을 전시장에서 태우고 난 흔적들을 전시함으로써(애초에는 타 들어가는 과정까지 전시하고자 하였으나, 결국엔) 일종의 폐허처럼 보이게 한 ‘창조’(양초, 2008, 설치) 등은 전시 자체가 ‘어떤 사건의 잔재 혹은 그 흔적’으로 제시된 작업들이다. 영상 작업의 특징을 활용하면서 인간의 기억이나 자취 등에 대한 비유로 읽힐 수 있다.
이 작업들은 ‘흔적’을 가시화 시키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경험케하고, 미래적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을 암시하는 작업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시간성’에 대한 작업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일차적으로 전시장에서 관람객이 보는 것은 결국에는 어떤 흔적들이다. 즉 관객의 시간에서 보자면 이들은 과거의 산물인데, 그것을 경험하는 관람이란 행위는 이 과거란 것이 어떻게 현재에 침투되어왔는지의 과정을 추적케 하는 과정이다. 때로 어떤 흔적들은 ‘죽음’의 이미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반복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란 것 까지도 암시되기도 한다. 즉 관객의 경험은 (여타의 사건들의) 흔적들, 그 흔적에 이르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이 미래적으로도 반복될 가능성 모두가 공존하는 시간대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다.
근대의 시간성을 전진하는 의미에서라기보다는 반복하는 의미에서 주목한 경우 이창훈의 작업 중에서 1999년의 ‘계획된 사각-partⅨ’에서도 보인다. 그는 건물 사진을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몇 개월에 걸쳐서 한 장씩 꺼내었다. 빠르게 도시화되어가는 ‘건설’의 이미지는 진보주의적인 미래를 향한 시간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 사진 이미지는 자연(땅속)에 의해 훼손되고 파괴되어 간다. 즉 이 훼손된 사진-이미지는 회상이나 트라우마적 느낌을 줌으로써 쇠퇴의 시간성을 보여주고 관객은 그것을 목도하게 된다. 이러한 역설적이고 아이러니한 시간성은 이창훈의 작업(뿐만 아니라 현대의 여타의 매체들)에서는 비교적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2006, 2007년 스틸 사진을 활용한 싱글채널비디오 작업인 ‘무제’, ‘리베라 메’, ‘걷다’ 등을 보면 작가가 영상매체를 주로 시간매체로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이들에게서는 그것을 경험하는 관객의 착시효과랄까, 착각, 판타지 등으로 매개되는 ‘우연성’이 특징이 됨을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는 스틸 사진 컷들을 반복해서 돌아가게 함으로써 (주로 고대의) 어떤 (부동적인, 고정적인) 동상 이미지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마치 근대 초기 시간의 기록으로써의 사진의 탄생이나 실험영화에서처럼 일선형적인 시간성을 활용한 테스트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누가 보는 자이고, 누가 찍는 자이며, 어떤 것이 대상인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에 있었다. 관객, 촬영(작가 혹은 매체), 대상 사이의 우연한 조우를 도출해보고자 한 것이 특징적이다(사실 나는 이것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의 우연은 의도한 우연이라기보다는, 기억이나 트라우마의 흔적들로서의 무의식, 환상 등까지도 매개하면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의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인 착각, 혹은 매체적 오류 등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에는 여타의 사진, 비디오, 혹은 미술이라는 매체에 관람이란 요소가 어떻게 매개되는가에 따라 그 매체의 특징이나 역할이 부여되는 것이다. 비매품이지만 유일하게 ‘판매된’ 작업인 ‘비매품’(캔버스에 아크릴, 2005)은 ‘빗나간 조우’이지만 ‘과녁을 맞힌 듯한’ 우연한 계기가 아닌가 싶다.
현대의 매체들이 하고 있는 이 역할 속에서의 주체상은 일종의 반복에 얽혀있는 주체상이다. 그/녀는 반복은 의심과 불안이 그 원동력이다. 물론 근대 이래로 그/녀는 의심과 반성의 주체였지만, 바로 그 의심의 대상이며 핵심이었다. 그/녀는 결코 의심으로부터 어떠한 확고부동한 상징 혹은 의미를 획득하지는 못한다. 의미망들로부터 미끄러질 뿐만 아니라 의미망자체가 어긋나게 된다. 아무리 상상적, 환상적 구성물로서의 상징적 질서 혹은 의미망으로 자신을 편입시켜본들, 또다시 그로부터 미끄러지고, 그 구성물은 해체를 거듭하며 괴상망측한 하이브리드가 되어간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실패한 채 알 수 없는 시/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이 반복의 사슬에 메여있는 것이 바로 분열된 현대 주체의 초상 자체이다. 그래서 현대 주체는 불완전함을 향유하는 자인 것이다. 차라리 그/녀를 림보에 갇혀있다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 그/녀는 림보의 시간에 갇혀있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림보가 아닌 어떤 상태에 있다는 망상이나 환상을 믿다가, 배반당하기를 거듭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A City’(싱글채널비디오, 2007), ‘Babelstreet’, ‘섬’(사진연작, 2007)과 어느 정도의 연장선에 있는 정미소에서의 개인전 “타인의 방”(‘벽’, ‘empty’, ‘입구’ 등의 영상 설치 작업과 ‘Babelstreet’, ‘A city’ 사진 혼합 설치, 2010)은 작가가 2007년부터 해온 도시사회시스템 속에서 소외되고, 고립되는 개인(자아) 혹은 주체에 대한 주제가 심화되는 과정으로 보인다. 이창훈이 언급하는 소외와 고립과 반영성을 특징으로 하는 주체는 상징적인 질서(이 질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 여타의 권리를 갖은 인간이라는 설정, 국가 혹은 사회라는 시스템의 하나의 구성원이자 하나의 주체 등등으로의 호명을 언급케 한다)에서 호명에 실패하는 자이다. 작가가 가시화시키는 ‘시스템’은 대부분은 출구가 없는 장면들이다. 그런데 하이브리드가 특징적인 현대의 시/공간성은 공간 이동의 불가능, 현대에서 미래로의 전진 불가능 등의 관점으로 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즉 차원을 알 수 없는 림보라는 시/공간의 외부, 그것의 출구가 없어지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이창훈의 작업으로부터 이 림보의 출구가 다 지워지거나, 막히거나, 심지어 연결을 한 들 외부가 없는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Babelstreet’, ‘조용한 풍경’, ‘A city’, ‘net’).
이번 개인전 “타인의 방”에서 ‘벽’과 ‘empty’와 같은 영상 설치 작업에서는 벽을 쌓는 그림자가 주인공이다. 물론 이 그림자는 주체의 반영으로서의 타자의 상이기도 하지만, 어딘지 어설프거나 어딘지 불완전한 자이다. 어쨌거나 이 그림자의 역할은 반복해서 끊임없이 벽을 쌓는 “타인의 방”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정미소)벽에 (그림자)벽을 쌓는다. 심지어 관객이 들어서야 할 정미소 갤러리 공간의 문마저 막아 버린다(‘입구’). 그런데 결국 텅 빈 공간과 벽만 남는 설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다름 아닌 벽을 쌓던 그림자라는 존재이다. 벽을 다 쌓고 나자 그림자는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닌, 전시장(혹은 방)에 있는 것도 아닌 채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애초에 벽을 쌓던 그림자는 그림자였기 때문에 그는 처음부터 사라질, 사라지는, 또 다시 사라질 존재였다. 과연 그는 탈출 혹은 비상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영원히 벽을 쌓는 존재로, 벽에 갇혀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어느 곳도 갈 수 없다. 이 갇힌 존재가 탈출하는, 혹은 호명받는 것은 아마도 누군가에게 속한 개별의 그림자가 되거나,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다른 질서 속에 속하거나 일 것이다. 즉 우리가 (지젝을 빌자면) 좀비 상태에서 벗어나기, 혹은 림보로부터 탈출하기는 새로운 상징적 질서로의 호명이거나 그 림보 자체가 질서가 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