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공간에서의 실존의식, 그 사회적 풍경

경계공간에서의 실존의식, 그 사회적 풍경

김종길 | 미술평론가

이창훈의 ‘타인의 방’은 전시공간을 획정하는 출입문 안팎의 뚜렷한 경계 짓기를 통해 21세기 고도자본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가 ‘위험사회(risk society)’의 이면을 가지고 있으며, 타인들은(그것은 나일 수도 있고 모두일 수도 있는 중층적이고 다의적인 개념일 터) 그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통제/억압/감시하거나 유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근대의 탄생을 감시와 처벌로 보았고, 판옵티콘(panopticon)의 구조 즉 감옥구조의 분석을 통해 그 실체를 해부했던 미셸 푸코와 닮았다. 통제의 주체가 다를 뿐.
근대사회가 지향했던 것이 사회가 개인을 통제하는 방식이라면, 이창훈의 ‘방’은 개인이 사회를 통제하는 방식이다. 그는 정미소 공간의 입구(문)에 다시 문틀을 놓은 뒤 그 문틀의 내부를 벽돌로 채워버림으로써 완전한 고립을, 경계 짓기를 시도한다. ‘입구-prologue’는 들어갔으나 나올 수 없는 상징적 체험을 관객에게 유도하는데, 내가 나를 그 안으로 인도하는 순간, 사회는 나로부터 갇힌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의 ‘위험사회론’이 기후변화나 금융위기, 테러리즘과 같은 현대사회의 ‘내재적 위험’에 주목한 것이지만, 위험사회의 위험조건들이 단지 그것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는 근본적으로 위험사회일 수밖에 없다. 위험조건은 우리의 삶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그는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위험사회의 글로벌화를 경고하고 있다. 이창훈의 ‘방’은 그런 위험사회의 확장성이 불러 온 광장공포에 대한 예술적 장치일 수도 있다. 우리는 방을 나서는 순간부터 사회적 규율과 제도 속에 놓인다. 근대이후, 사회는 개인의 자율과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거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거대한 감옥으로 돌변해 왔기 때문에 광장의 민주성을 상실한지 오래다. 현실적 조건을 부정하지 않는 한에서, 우리가 이 사회를 탈출하는 것이 가능할까? 거의 불가능하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방 밖에서 위험하고, 방 안에서 더 쉴 만하다. 사회를 탈출하는 길은 ‘타인의 방’에서만 가능하다.
‘Net’는 도시의 길을 그물로 바꾼 것이고, ‘A City’는 그런 길을 지운 것이다. ‘Net’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울리히 벡이 주장했던 위험사회의 보이지 않는 위험조건에서 비롯된 듯하다. 흥미롭게도 그는 그런 그물(잘 짜인 도로)들이 삶의 조건을 더 희망차게 하거나 행복지수를 높이는 따위와는 무관하다고 판단한다. 도시의 그 수많은 길들이야 말로 통제로서의 ‘가둠’을 극대화 하는 조직적인 망이기 때문이다. ‘A City’는 도로를 지운, 길이 없는 도시다. 길이 사라진 도시는 오직 빌딩 숲이다. 그것은 마치 망망대해의 작은 섬과 같다. 그렇다면, 그 도시는 위험사회로부터 자유로운가. 미셸 푸코에 따르면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감옥구조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운영논리를 발견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감옥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외부와 차단된 감옥에서 죄수들은 엄격한 재사회화 과정을 반복하는데, 우리 사회도 이런 감옥의 운영원리와 일치하는 ‘감금사회’이며, 바로 그것은 또한 사회통제의 제1 원리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A City’는 감금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끔찍한 도시 풍경이다. 그리고 그 도시는 현대식 감옥의 원형인 판옵티콘과 다르지 않다. pan은 “넓은, 포괄적인”이란 뜻을 지닌 라틴어 접두사이고, opticon은 “보다”의 뜻이다. 감옥의 중앙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간수들이 죄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효율적으로 감시하는 사회, 그 사회는 지금 여기의 현대도시인 것이다.
‘조용한 풍경’은 민주주의의 한 상징인 국회의사당의 창과 문을 모두 지워버림으로써(그 의미는 창과 문을 모두 막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권력의 비민주성을 풍자한다. 통제로부터 제도로부터, 그리고 감시로부터 개인과 시민의 자율성을 복권시키고 유포시키는 국회의 기능이 얼마나 상실해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제스처일 수 있으리라. 국회는 판옵티콘의 전망대에 해당한다. 그들은(감시자들은)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자유가, 평화가 위협받는 것을 감시할 의무를 가지며, 폭력에 대해 감시에 대해 모든 은폐된 규율들에 대해 제제할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그들의 책무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때 사회는 급격한 반작용을 겪는다. 세계는 혼란에 휩싸이고 욕망이 난무하며 개인을 짓밟고, 그 사이 일그러진 권력과 부패한 권위주의가 상승한다. 광장은 사라지고 소리는 잦아들며, 침묵은 방에 고인다.
그러나 이 모든 사회적 해석의 정치성은 이창훈의 경우 ‘개인’에게 집중된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모두 그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모두 정치적이라는 사회적 정의가 아니라면 이러한 해석은 무의미할지 모른다. 아니 너무 과장된 것일 수도 있을 터이다. 이창훈의 미학적 문제의식은 그 지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Open Studio’를 보라. 이 작품은 그가 수원의 한 건물 지하공간에 물을 채운 뒤 배를 띄운 것이다. 사진 속의 지하공간과 정미소가 의미론적으론 다르지 않다. 실제로 그는 정미소에 배 한 척을 띄웠다. 그가 고백하는 것처럼 그것은 표류하는 자아일 수도 있고, 고립에 대한 시각적 장치일 수도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들처럼, 자신의 존재적 자각을 위해 오직 한 그루의 나무만을 맴도는 그런.
이창훈은 미셸 푸코식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탐색이나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미학적 현시로서의 작품을 제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작가로서의(개인으로서 시민으로서 그것이 무엇이든) 실존의식이다. 언어의 통제는 곧 ‘Babelstreet’의 경우처럼 소통 불가능한 사회의 단면이고, ‘벽’은 그 단면의 안쪽이다. 독일과 한국에서, 삶이 그에게 던져준 많은 문제의식은 곧 나와 타인에 관한 것이었고, 그것은 자율과 타율, 위험과 통제의 사회체제보다는 근원적인 존재의식이었다. 이번 전시는 수년 간 그가 방 밖에서 느꼈던 것들을 방 안으로 바꿔놓은, 아니 방 밖의 사회풍경을 뒤집어 까서 방 안의 풍경으로 제시한, 경계공간이다.